메뉴 건너뛰기

Extra Form
설교일자 2022년 4월 10일 종려 주일 예배
본문 마21:1-11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설교자 장길준 목사

21:1-11 

나귀를 타신 겸손하신 예수님


오늘 주일은 종려주일 입니다.

종려나무가 주는 의미하는 뜻은 의와 아름다움과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고난 주간의 첫날로 종려 주일이 시작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할 당시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개선하는 왕처럼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므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흔든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 종려 주일을 호산나 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할

당시에 환영하는 무리가 '호산나'라고 외친 데서 유래된 것입니다.

종려 주일은 서 로마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낭독했기 때문에

'고난의 주일'이라고 유래가 되었습니다.

 

*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에 환영을 받으신 예수님의 마음의 심정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환호하는 무리들이 자신을 못을 박으라고 돌변할 자들임을 미리 아셨습니다.

며칠 후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애수님께서는 인간들의 죄 값을 대신 치루시고 십자가에서 구원을 주시려는 뜨거운 사랑으로

백성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크고 감사한 일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나의 구원자요, 메시야가 되셨음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겸손과 온유를 배우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행적 중에 삼분의 일이 수난에 관한 기사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예수님의 고난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주간 동안에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위해서

예루살렘성에 어린 나귀를 타시고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가 종려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감람산 벳바게 마을로 가서 사람이 아직 한 번도 타지 않는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하면 주께서 쓰신다'라고 말하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왕으로서의 명령이었습니다.

나귀를 무조건 끌어오라 명령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만물의 주인이 되심을 말해 줍니.

그 어린 나귀를 타시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시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옷을 벗어 길에 깔았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외치면서 왕으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찬양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때 같았으면 주님은 이런 일을 금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입성하신 것 오히려 그런 분위기를 예수님이 유도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금하지 않고 자신이 바로 왕이심을 인정하시면서

왕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왕적 능력과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라면 나귀보다 훨씬 품위 있는 짐승을 타고 위세가

당당하게 입성하셔야 마땅할 것입니다.

왕의 공적인 행차치고는 매우 초라하신 모습의 예루살렘 입성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심을 인정하시면서 이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까?

주께서 이런 모습으로 입성하는 것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 왕으로, 메시야로, 구세주가 오실 때에는 겸손하여 나귀와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주님의 사역의 본질을 보여 주신 말씀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겸손하신 예수님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대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왕,

메시야는 겸손하여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자로서의 사역을 완성하는 시점에서

주님은 그 구원사역의 본질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은 그 출생부터 겸손으로 일관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왕이셨기 때문에 왕 이신 것 그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섬기기 위해서 오신 겸손하신 왕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세상 임금처럼 천리마를 타고 약자를 짓밟으며 예루살렘을 점령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멍에를 지신 겸손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이 번쩍이는 완장이 아니라 사람들의 입었던 겉옷을 걸치었습니다.

사람들이 벌벌 떨면서 머리 숙이는 백성들 앞을 도도히 행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자원하여 겉옷종려나무 가지를 펴드리는 그 위를 겸손하게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겸손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겸손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타신 짐승도 어린 나귀 새끼였습니다.

 

성도들은 지금 이 땅위에서 왕의 사신입니다.

왕의 사역을 대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왕이신 예수님의 겸손의 원리로 사명을 담당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우리는 충성스런 사신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서로가 높아지기를 서로 경쟁적으로 원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까닭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높아지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종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겸손하신 왕 예수님을 본받는 종들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겸손의 삶을 본받는 비결은

1) 주님을 태워드린 어린 나귀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이 나귀는 연약한 몸으로 주님을 태워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대개 말처럼 씩씩하고 힘센 자를 쓰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제 힘을 자랑하니까요.

물론 말처럼 힘센 자도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귀는 힘이 없지만 주님이 쓰신 것은 겸손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어린 나귀처럼 겸손한 자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이 어린 나귀 새끼는 주님이 지시하는 대로 걸어갔습니다.

이 나귀도 제 갈 길을 가고 싶은 곳이 있었겠지만

새 주인이신 주님의 지시에 따라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오늘 우리도 나귀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짊어지고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묵묵히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이 나귀는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실 제일 수고한 자는 나귀였습니다.

 

3) 고생은 나귀가 하고 기분은 제자들이 낸 것입니다.

나귀 새끼처럼 이처럼 책임은 내가 지고

공로는 이웃에게 돌리고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는 삶을 나귀처럼 살아야 됩니다.

 

* 하루는 나무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회의의 의제는

 

'이제는 우리도 왕을 모시고 잘 살아보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들은 먼저 감람나무에게 왕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감람나무는 "감람유를 생산하여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주어야하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라고 사양했습니다.

그 다음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는데 포도나무 역시

"좋은 열매를 맺기 바빠서 왕 노릇을 할 수 없다"라고 거절했습니다.

화과나무에게도 왕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무화과나무 역시 꼭 같은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고민 끝에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더니 가시나무는 쾌히 수락하면서

"이제 난 너희들의 왕이다 앞으로 내 명령을 듣지 않은 자들은

이 가시로 사정없이 찌을 것이다." 라고 소리를 쳤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혹시 우리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서

가시나무 왕 노릇을 하려고 덤벼들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을 점검하고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겸손하신 왕입니다.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몸 된 교회를 우리에게 짊어지고 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힘자랑하다가 주님을 땅 바닥에 내동이 치지나 않았습니까?

내가 영광을 받고자 하지 않았습니까?

직무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는 나귀처럼 예수님께 꼭 필요한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

예수님을 편안히 목적지까지 불평하지 않고, 자기 자랑하지 않고 잘 모셔드리는

신실한 나귀와 같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겸손과 능력은 별개가 아닙니다.

겸손한 자는 능력이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은 겸손한 법입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을 참으로 겸손하게 잘 모시는 일꾼들이 됩시다.

다만 약간 덜 익은 자들이 오만을 부리고 주위를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 주님이 허락하시는 참 능력을 받아 이를 온전히 발휘하기에

어느 누가 봐도 주님처럼 겸손한 자들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